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괜히 밤산책이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 가을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줄 무대가 있다면 바로 이런 공연이 아닐까요?

경복궁 집옥재에서 만난 <발레×수제천> 이야기입니다.

<발레×수제천>은 2022년 초연 이후 매회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은 고궁음악회의 대표 공연입니다. 이번 공연이 펼쳐진 경복궁 집옥재는 ‘옥처럼 귀한 것을 모은다’는 뜻을 가진 공간으로,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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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고궁의 앞마당에 앉아 집옥재의 처마를 바라봅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처마 끝에 걸린 달과 함께 조선 궁중음악의 백미로 꼽히는 수제천(壽齊天)​의 가락이 울려 퍼집니다. 그렇게 특별한 가을밤의 무대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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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_국가유산청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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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우아함을 입은 발레, ‘발레 정재’

‘정재(呈才)’는 재능과 기예를 바친다는 뜻으로, 궁중무용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궁중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금빛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무대에 등장하고, 느리고 유장한 수제천의 가락 위로 발레의 움직임이 펼쳐집니다.

수제천의 음악은 한 음 한 음이 쉽게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인데요. 그래서인지 무용수들의 길고 유려한 라인이 더욱 돋보였어요.

발레의 아름다운 선이 전통음악의 느린 호흡을 만나니, 평소 공연장에서 보던 발레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남자 무용수가 여자 무용수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린 채 무대를 가로지르는 순간은 마치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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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_국가유산청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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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과 도깨비가 나타난 밤, ‘발레 판타지’

두 번째 마당은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북악산 요정으로 등장한 어린 무용수들이 밤하늘의 반딧불이처럼 반짝이고 귀여운 날갯짓을 하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어요.

곧이어 판소리 소리꾼의 신명나는 태평가가 울려 퍼지고, 도깨비로 분한 남자 무용수들이 등장합니다.

경쾌한 가락에 몸을 맡긴 무용수들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데요.

엄격하고 정교하게만 느껴졌던 발레의 문법이 우리 전통의 흥을 만나니 어느새 신명나는 한마당으로 변신합니다.

발레인데 이렇게 흥겨울 수 있다니!

말 그대로 ‘판타지’ 같은 무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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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x수제천> 커튼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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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흥과 발레의 에너지, ‘발레 비나리’

마지막 무대는 임금을 상징하는 듯한 한 무용수의 위엄 있고 절제된 독무로 시작됩니다.

뒤이어 붉은색 한삼을 낀 남녀무용수들이 등장해 사물놀이의 힘찬 장단에 맞춰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자 조용히 무대를 내려다보던 집옥재에 오방색의 빛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단순한 공연 관람을 넘어 이 공간의 역사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수백 년의 시간을 품은 고궁과 전통 예술을 과거의 유산으로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예술과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앞마당에서 벌이는 잔치’​처럼 이 공연이 관객과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새로운 문화적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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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x수제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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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고 싶은 가을밤

<발레×수제천>은 K발레를 대표하는 K-Arts 발레단, 사물놀이 연희컴퍼니 ​유희, 그리고 공연의 전 악장 연주를 위해 모인 ​수제천 프로젝트 팀 등 약 90명의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연입니다.

발레와 궁중음악, 사물놀이와 판소리, 그리고 고궁이라는 공간까지. 서로 다른 것들이 한 무대에서 만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쉽게 뜨고 싶지 않았어요.

선선한 가을바람, 고즈넉한 고궁의 정취, 그리고 아름답고 신명나는 무대. 고궁의 처마 아래로 달빛이 내려앉던 그 밤은 올가을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날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이 특별한 무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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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고궁음악회〈발레×수제천〉

장소 경복궁 집옥재 앞마당

일시 2026. 10. 02(금) ~ 10. 05(월) 19:00 ~20:10(8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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